지하철이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노엘 로즈는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병원을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었다. 아직 오후 진료가 다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 마망! 저거 좀 봐요. 마망! ”

“ 쉿 조용히 해. ”

 

지하철을 타던 노엘 로즈는 꼬마의 외침에 아이가 가르킨 곳을 바라봤다.

 

그것은 지하철의 마지막 칸이었다. 다른 칸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만 모종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두려운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모두 노란 색 별이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다. 유태인들이었다.

 

파리의 모든 유태인들은 작년부터 가슴에 노란별을 달고, 지하철을 탈 때는 맨 마지막 칸을 타야하며, 또한 지정된 시간에만 외출할 수 있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도 점점 많아졌다.

 

‘ 제롬을 도와준 걸 알면 나도 뱅상 삼촌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뱅상과 제롬을 떠올리자 노엘 로즈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 베아르 선생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원장님이 내내 찾으셨어요. ”

 

급하게 진료실에 들어선 노엘 로즈에게 델핀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 원장님이? ”

 

노엘 로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무슨 일 때문에 찾으시는데.... ? ”

“ 그건 모르겠어요. 빨리 가보세요 ”

 

왕진 가방을 들고 뛰쳐나간 노엘 로즈를 본건 델핀 만이 아닌 듯 했다.

 

“ 똑똑- ”

“ 들어오시오. ”

 

노크와 함께 들어선 원장인 닥터 놀로의 사무실에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함께 있었다.

 

“ 닥터 베아르, 어딜 갔다 이제 온 거요. 오후 진료도 보지 않고.”

“ 죄송합니다. ”

“ 삼촌이 수술했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이요? ”

“ 네... ”

 

어느 새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 닥터 놀로, 소개를 시켜 주시죠. ”

“ 아., 이 쪽은 우리 병원의 닥터 노엘 로즈 베아르 선생이고. 이 쪽은, ”

“ 레온 슈나이더 대령이요. ”

“ 만나서 반갑소. 노엘 로즈 베아르 선생.”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대단히 훌륭했다. 나치 장교 치고는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와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에 노엘 로즈는 순간 당황했다.

 

“ 네.. 노엘 로즈 베아르입니다.”

 

마지 못해 잡은 슈나이더의 악수는 힘차고 거침이 없었다. 남자는 녹회색 자켓을 입고 있었고, 왼팔에는 나치 문장이 선명하게 그려진 빨간색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자켓 소매 왼쪽 끝에는 작은 패치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검정색 마름모꼴 안에는 회색으로 "SD " 라고 수놓아져 있었다.

 

그건 나치 친위대 SS의 보안 방첩부 소속이라는 표식이었다. 노엘 로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 SS 방첩부 장교가 왜 여기에...설마 벌써 눈치 챈 건가.. ’

 

슈나이더는 그런 노엘 로즈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며 미소 지었다. 노엘 로즈는 슬며시 손을 빼려 했지만 슈나이더는 그녀의 손을 쉽게 놓지 않았다.

 

“ 파리에 온지 두 달 밖에 안됐소. 앞으로 잘 도와주길 바라오. 노엘 로즈 베아르 선생. ”

“ 네? 제가 뭘 도움이 되겠습니까.... ”

“ 그거야 알 수 없지요. ”

 

닥터 놀로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끼어들었다.

 

“ 아니, 대령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일개 의사에게 무슨 그런 말씀을. 파리에 오신 지는 이제 겨우 두 달 밖에 안됐지만 대령님이 실세라는 소문이 자자하시던데요. ”

“ 그런 소문이 났나요? ”

 

슈나이더 대령은 그야 말로 순 혈통 아리아인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금발의 녹색 눈, 큰 키에 넓은 어깨. 히틀러가 찬양하는 아리아족의 순 혈통임을 보여주는 육체적인 외양은 나치 친위대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나치 친위대의 고급 장교 코스를 따라 고속 승진을 하기 위해서 기본 중의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삼십대 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슈나이더가 벌써 대령인 것은 그의 그런 외모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임이 틀림 없었다

 

“ 워낙 독일에서도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시고 숙부님이 총통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저희 병원도 잘 부탁드립니다. 슈나이더 대령님”

 

한 껏 상기 된 채 비위를 맞추는 닥터 놀로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노엘 로즈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 닥터 놀로, 얘기는 병원을 먼저 둘러보고 해도 되겠소? ”

“ 네? 지금이요? 아, 그럼요. 그럼 이 쪽으로..”

“ 실례가 안됀다면 병원 안내를 닥터 베아르에게 좀 부탁해도 돼겠소? ”

“ 네? 제가요? ”

 

뜻밖의 제안에 노엘 로즈는 깜짝 놀라 병원장을 바라봤다. 드니 놀로 병원장은 당황스런 얼굴로 우물거렸다.

 

“ 그건....”

 

슈나이더 대령이 시선을 노엘 로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원장에게 물었다.

 

“ 부탁하겠소. ”

“ 그럼요. 그럼요. 베아르 선생, 대령님을 잘 모시게. ”

 

닥터 놀로의 성화에 노엘 로즈는 할 수 없이 슈나이더를 데리고 병원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 여기는 응급실이고 이쪽은 수술실입니다. 입원실은 3층부터 있습니다. 시설은 다른 병원과 거의 비슷하죠. ”

“ 그렇군요. ”

 

슈나이더는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병원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노엘 로즈의 말을 열심히 경청했다.

 

‘ 이 독일군 장교는 갑자기 여기 왜 온 걸까? 설마 뱅상 삼촌 때문에? 미행이라도 당한 걸까 ’

 

제 발 저린 도둑 마냥 노엘 로즈는 어서 이 시찰을 끝내고 자신의 진료실로 도망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 어머, 아니 그런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슈나이더 대령님, 원장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

“ ..... ”

 

슈나이더는 별 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노엘 로즈를 쳐다봤다.

 

“ 이 복도를 쭉 따라 가면 원장실이 나옵니다. 저는 오후 진료가 밀려 있어서 여기서 그만, ”

 

노엘 로즈는 한껏 미소를 띈 채 뒷걸음쳤다.

 

“ 선생은 내가 싫은가 보군요. ”

“ 네?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왜 슈나이더 대령님을 싫어하겠습니까. 하하하- ”

‘ 이 독일군 자식은 눈치가 귀신이다. ’ 노엘 로즈는 속으로 생각했다.

 

“ 싫어하지 않는다? 그럼 다행이군요. ”

“ 다행이라니요. 하하하- ”

“ .... ”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던 노엘 로즈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슈나이더 대령의 차겁고 예리해보이는 녹청색 눈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눈은 뭐든 꿰뚫어볼 것 같았고 뱅상 삼촌과 제롬의 일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두려움이 그녀의 온 몸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