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2차 대전에 참가하자마자, 눈 깜짝 할 틈도 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1940년 6월 14일 파리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다. 철통같다 믿었던 프랑스의 마지노 요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브르크를 통해 마지노선을 우회해버렸고 순식간에 파리로 진격해 들어왔다.

 

독일군은 프랑스를 둘로 나눠 파리를 위시한 북부는 직접 통치했고, 남부는 꼭두각시인 페텡 장군을 수뇌부로 앉힌 비시정부의 지배 아래에 놓고 통제했다. 이제 프랑스의 유일한 희망은 연합군뿐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연합군은 상륙작전을 한다는 소식만 들릴 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한 때는 자유와 사랑의 도시였던 파리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고, 프랑스가 해방될 거라는 장밋빛 희망은 3년째에 접어들자 점점 퇴색되어갔다. 그저 허울뿐인 평화에 파리는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 넘어지시면서 설마 뇌도 같이 다치신 건가- ’

노엘 로즈는 손 바닥위에 놓인 은빛 열쇠를 흐려진 얼굴로 쳐다봤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뱅상이 건넨 열쇠였다.

 

“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 집에 좀 가 다오- ”

뱅상의 입은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고, 대신 그의 눈빛이 뭔가를 말했다. 노엘 로즈는 그것이 무언지 알 수 없었지만 뱅상이 응급실 안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살피는 걸 보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 알겠어요. 삼촌이 수술실에 들어가시면 바로 갈께요.”

“ 약속했다. 노엘. ”

자신이 이름을 다 부르지 않고 ‘ 노엘’ 이라고 부르는 건 삼촌이 다급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 약속해요. ”

 

직계 가족인 노엘로즈는 병원의 규칙대로 수술실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뱅상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곧 회복실로 옮겨졌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뱅상을 곁에서 지켜보던 노엘 로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원을 빠져나왔다.

 

뱅상의 집은 파리 시외 근교의 작은 주택으로, 오렌지색과 회색빛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2층 집이었다. 여름이나 겨울에도 좋았지만 특히 봄에 아름다웠다. 뱅상의 집을 둘러싼 사과 나무들은 매년 4월마다 연분홍색 사과 꽃을 구름처럼 피어올렸다.

 

특히 두 사람은 뱅상의 서재 큰 채광창을 통해 보는 정원의 풍경을 좋아했다. 노엘 로즈가 14살 이후로 두 사람은 매년 봄마다 정원의 사과나무들을 바라 봤다. 꽃으로 둘러 싸인 뱅상의 집을 노엘 로즈는 “구름 성” 이라 불렀다.

 

“ 노엘 로즈야. 여긴 구름성이란다. 네가 힘들고 괴로운 땐 언제든 여기로 도망쳐 오렴. 삼촌의 옆으로 말야. 여기 구름성은 네 꺼란다. ”

 

14살의 노엘 로즈는 부드러운 삼촌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녀가 이 구름성에서는 울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어른인 척 상심한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차마 울지 못했던 조숙한 꼬마 숙녀였던 노엘 로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이 곳 ‘ 구름성’에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1년 만에 방문이었다.

뱅상 삼촌의 집은 언제나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깨끗하며 아늑했다. 삼촌은 정리정돈이나 청소에는 문외한이었지만 20년 된 충직한 가정부인 안느는 깔끔하고 부지런한 성격이었다.

 

뱅상의 집 앞에 선 노엘 로즈는 현관문을 열기 전에 일단 초인종을 눌렀다. 언제나처럼 안느 아줌마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다 노엘 로즈는 현관문이 열려 있다는 걸 깨닫고 어리둥절했다.

 

' 안느 아줌마가 어디 외출하셨나? '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노엘 로즈는 더욱 더 당황했다. 뱅상의 집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여기저기 물건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고, 먼지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 안느 아줌마? 안느 아줌마- "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엘 로즈는 이 모든 상황이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삼촌과의 약속대로 옥스퍼드 사전을 찾으러 서재로 향했다.

 

역시나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지저분한 접시와 책들이 여기저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걸까 ? ’

의구심과 혼란에 빠져 서재의 한 가운데 서 있던 노엘로즈는 결국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뱅상이 부탁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뱅상의 서재는 큰 채광창이 있는 벽 한 면을 제외하고 나머지 3면이 모두 크고 높은 책장으로 둘러져 있는 형태였다. 특히 창문을 마주 보는 면의 책장은 한 쪽 벽을 전부 다 채우고 있었다.

 

"옥스퍼드 영문학 사전 "

노엘 로즈가 찾는 사전은 채광창을 마주보는 책장의 위쪽 구석에 꽂혀 있었다.

 

‘ 이거다- ’

한 쪽 벽면을 완전히 채운 책장의 꼭대기에서 사전을 꺼내 들고 살펴보던 노엘 로즈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두꺼운 영문학 사전은 특별히 다를 바가 없는 사전일 뿐이었다.

 

‘ 모르겠어. 왜 이 사전을 가져와 달라고 하신 건지..’

그 때 문뜩 노엘 로즈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책 장 앞 마루 바닥이었다. 바닥은 뭔가에 긁힌 자국 투성이었고, 또한 얼룩들로 지저분했다.

 

노엘 로즈는 곧 얼룩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 피다!! ’

 

그랬다. 바닥은 검붉은 피방울로 잔뜩 얼룩이 져 있었고 그것들은 생긴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순간, 노엘 로즈는 뱅상 삼촌에게 받은 은빛 열쇠가 떠올랐다. 열쇠는 머리 가운데 십자가와 함께 C.S.P.B 라는 라틴어가 사방에 각각 새겨져 있었다. 유심히 열쇠를 살피던 노엘 로즈는 곧 이것이 어린 시절 삼촌과 가지고 놀던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노엘 로즈는 뱅상의 서재를 특별히 좋아했는데, 그건 이 서재 안에는 비밀이 하나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건 역시! ’

노엘 로즈는 즉시 자신이 방금 사전을 뽑아낸 책장의 안쪽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작은 열쇠 구멍이 잘 숨겨져 있었다. 노엘 로즈는 즉시 은빛 열쇠를 그 구멍에 밀어 넣었다.

 

“ 덜컹 - ”

책장은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책장이자 숨겨진 비밀 공간의 입구였다. 비죽이 열린 책장의 틈새 사이로 이 방안과는 다른 이질적인 냄새가 어둠과 함께 흘러나왔다.

 

‘ 이건 삼촌이랑 나만 아는 비밀공간인데... 삼촌은 여기에 무얼 숨겨 놓으신 거지? '

노엘 로즈는 뱅상 삼촌이 레지스탕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혈질인 뱅상 삼촌은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 3년 전부터 독일이 벌인 이 전쟁에 대해 심한 욕을 해대곤 했다. 십년만 젊었다면 전쟁에 참전했을 거라는 것이 최근 뱅상의 입버릇이었다. 무엇보다 병원에서의 뱅상의 태도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노엘 로즈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설마... ’

어쩌면 책장 너머의 공간에는 연합군과 접선을 하기 위한 무전기나 암호들이 가득할지도 몰랐다. 또는 총이나 폭탄 같은 무기들이 숨겨져 있을 지도.

 

" 우왓-! "

갑자기 책장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고, 다음 순간 노엘 로즈는 마루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 ! ”

 

누군가가 책장문 안 쪽에서 튀어 나왔고, 노엘로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낯선 남자 하나가 그녀 위에 올라탄 채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자가 낮고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 누구냐?! 넌?! "

자신의 위에서 쏘아보는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노엘 로즈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 누구냐니까-! "

남자는 한 번 더 위협적으로 말하며 차거운 감촉의 무언가를 그녀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노엘 로즈는 자신의 목덜미에 닿고 있는 것이 나이프라는 걸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