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3월이었다.
하지만 병원 안은 여전히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은 언제나 끝나게 될까.’
생각에 잠긴 노엘 로즈의 푸른빛 눈동자는 평소의 부드러운 빛을 잃고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섬세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노엘 로즈의 옆모습은 의사가 천직인 듯 하얀 가운과 잘 어울렸다.
‘ 3월 인데 오히려 더 추운 거 같아. ’
얇은 의사가운을 걸친 채 진료실 창문으로 을씨년스러운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노엘 로즈는 다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살짝 진저리를 쳤다.
‘ 언제까지 독일군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꼴을 봐야 하는 건지..’
나치 휘장을 두른 독일군들이 개선문을 통해 파리 시내로 행군해 들어온 지 벌써 3년 하고도 3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 똑똑- ”
“ 네- ”
문이 열리며 델핀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 갓 스무 살의 견습 간호사였다.
“ 베아르 선생님, 오후 진료 스케쥴이예요. ”
델핀이 발그레한 얼굴로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노엘 로즈에게 차트를 넘겼다. 간호사인 델핀에게 의사인 노엘 로즈는 동경의 대상인 듯 했다.
“ 고마워요. 델핀. 점심은 먹었어요? ”
노엘 로즈의 질문에 델핀의 얼굴이 금새 발그레 하게 붉어졌다. 같은 여자들에게 노엘 로즈는 이상하게 인기가 많았다.
“ 네, 네. ”
당황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델핀을 노엘 로즈는 귀엽다고 생각했다.
‘ 분명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거야. ’
그 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후배 의사가 급한 얼굴로 노엘로즈를 호출했다.
“ 닥터 베아르! 응급실입니다! ”
황급히 응급실로 향하며 노엘 로즈가 물었다.
“ 폭격이야? ”
“ 네? 그건 아닌데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멀건이 쳐다보는 후배를 보자, 노엘 로즈는 머쓱해졌다.
“ 헤헤- 그렇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
맥없이 나치에게 점령당한 후 파리는 어이없을 만큼 평화로웠다.
처음 1달 만해도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파리 시민들은 일부 피난을 가기도 하고, 집 밖 외출을 자제하여 거리는 한산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군들은 폴란드나 동유럽의 점령지와 달리 프랑스에게 점잖게 굴었고, 별 다른 약탈도 일삼지 않았다.
긴장감에 쌓여 있던 파리는 몇 달 후 오히려 독일군들의 상대로 장사하는데 익숙해졌다. 적어도 겉으로는 예전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로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흘러갔다. 어느 덧 3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파리는 전쟁 중이라는 걸 잊어가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건 식료품을 구하기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 뿐.
그저 이따금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독일 SS 친위대 간의 살벌한 숨바꼭질이 벌어지기는 했다. 아주 드물게 시내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네덜란드나 벨기에처럼 전투기 폭격이나 대량 체포나 연행 같은 건 없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2차 대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라디오의 뉴스만이 바깥세상을 긴박한 상황을 알려줄 뿐이었다.
노엘 로즈가 급히 달려간 응급실 병상 위에는 60대의 노신사가 누워 있었다.
“ 뱅상 삼촌- ?! ”
노신사는 노엘로즈의 삼촌인 뱅상 베아르였다.
“ 으윽- 어, 별거 아니야. 급하게 오다가 좀 굴렸어. 에이- 씨- 그 망할 놈의 계단 같으니라구- .”
곧 후배의사가 노엘 로즈에게 뱅상의 상태를 보고했다.
" 갈비뼈 2대 골절에 내장출혈 증세가 보입니다. 아마도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내장을 찌른 거 같습니다."
“ 어윽- 갈비뼈가 나갔어? 어쩐지 아프더라. 그놈의 자식- 부러지려면 곱게 부러질 것이지. 에이 썩을- ”
뱅상은 퇴직한 대학 교수치고는 말이 거칠었다.
“ 뱅상 삼촌 - 걱정 마세요.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노엘 로즈는 후배에게 눈짓으로 수술 준비를 지시했다. 후배의사는 신속히 사라졌다.
“ 얘야- 노엘 로즈야- 어으윽 -”
“ 말씀 많이 하지 마세요. 아파요.”
모르핀을 주사할까 고민하며 노엘 로즈가 대꾸했다.
“ 내 좀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 말야. 으..윽- ”
말할 때 마다 뱅상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 네. 나중에요. 일단 치료부터 하고요. ”
노엘 로즈의 새하얀 의사가운을 뱅상의 떨리는 손이 급히 움켜쥐었다.
“ 안돼- 지금 당장- 지금 당장 우리 집에 좀 가줘야 겠다- ”
“ 뱅상 삼촌? ”
“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빨리- ”
“ 뱅상 삼촌.? 지금이요? ”
“ 그래- 지금 당장- ”
“ 서재에 있는 옥스퍼드 영문학 사전, 그걸 가져와- ”
“ 사전? 영문학 사전이요? ”
노엘 로즈는 어리둥절한 채 되물었다.
“ 그래, 지금 당장- 으... 옥스퍼드 영문학 사전이다. 노엘- ”
뱅상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무서우리만큼 번쩍거렸다.
“ 이걸 받아라”
뱅상이 건넨 것은 은색의 작은 열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