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5년 전 장학생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이듬해 2차 대전이 발발 후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걸 런던에서 들었다고 했다. 가족과 연락이 끊겼고, 조국으로 돌아오려 애썼지만 유태계인 그의 출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됐다. 프랑스로 도로 들어오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했다.

 

3개월 전 간신히 파리에 들어 왔지만, 그의 가족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의 가족은 부모님과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간신히 얻은 그의 가짜 신분은 곧 독일군에게 들통이 났고 그 뒤로 그는 대학 은사였던 뱅상 삼촌의 도움으로 내내 숨어 지냈다고 했다. 유태인인데다 영국에서 유학했다는 이유는 독일군에게 잡힌다면 총살 당하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 나에 대해서는 거의 다 말했고. 자, 당신은? ”

“ 나? ”

“ 나이가 몇이요? ”

“ 어차피 몇 일 있다가 헤어질 건데 무슨 의미가 있어. ”

“ 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

“ 뭐? ”

“ 돌아 올거야. 빠리로. 전쟁이 끝나면. ”

“ 끝나긴 하나.. 이 지겨운 전쟁이.... ”

“ 전쟁은 반드시 끝나. ”

 

제롬은 단호하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의 눈은 이글거렸다.

 

“ .... ”

“ 그래서 내 목숨은 구해 줘도 나이는 안 알려 줄건가? ”

“ ... 서른. ”

“ 오와. ”

“ 그러는 당신은? ”

“ 스물 여덟. ”

 

노엘 로즈는 놀라서 대꾸했다.

 

“ 뭐? 당신이 정말 스물 여덟이라고? ”

“ 왜? 스물 여덟로 안 보여? ”

“ 전혀. 쯧쯧, 그동안 고생을 정말 많이 했군 그래. ”

 

노엘 로즈는 제롬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짖궂은 얼굴로 놀렸다.

 

“ 내가 정상이지. ”

 

제롬 역시 웃으며 받아쳤다.

 

“ 얼씨구, 누나한테- ”

 

노엘 로즈는 제롬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이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쟁이 터지고 파리가 나치의 점령 하에 들어간 지난 3년 간 그녀는 겉으로는 항상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누구와도 진심으로 웃을 수 없었다. 사실 누군가와 솔직하고 가식 없이 제대로 마음으로 나눈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제롬의 상태는 나날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노엘 로즈는 낮에는 뱅상을 살피고, 퇴근 후에는 제롬을 보살폈다.

 

안느 역시 뱅상의 병실에 매일 찾아왔다. 손에는 항상 직접 만든 레몬 타르트, 라따뚜이, 특제 양파 수프 등등을 들고 와서는 각종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뱅상은 그런 안느가 반가우면서 지겨운 듯 매일 투닥거렸다. 안느는 병원에 올 때마다 노엘 로즈에게 너무 말랐다는 잔소리와 함께 온갖 음식을 안겨댔고, 그녀는 퇴근 후에 그 음식을 제롬과 나눠 먹었다.

 

“ 교수님은 언제쯤 퇴원하시지? ”

“ 이 번주 금요일. 삼촌은 당장 퇴원하겠다고 성화시지만.”

 

수요일 오후, 안느의 레몬타르트를 함께 먹으며 두 사람은 서재 책상에 마주 앉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그거 알아? 노엘 로즈 당신 처음 본 순간 이미 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는 걸. 교수님이 항상 당신 얘기를 하셨거든. ”

 

노엘 로즈는 마카롱을 먹다 말고 제롬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 안 믿어. ”

“ 왜? ”

“ 처음 그날 넌 그때 내 목에 칼을 들이댔다구. ”

“ 그때 일은 이제 좀 잊어 줘. ”

 

제롬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그거 버릇이야? ”

“ 어? ”

“ 제롬 넌 미안하면 고개를 이렇게 하더라고. ”

 

노엘 로즈는 제롬을 따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고개을 기울이고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은 금새 키스를 할 듯한 연인사이처럼 보여졌다. 두 사람의 시선은 어느새 서로를 향해 멈추어 있었다.

 

“ .... ”

“ .... ”

 

그때였다.

 

“ 뱅상 형님-! 아무도 없소? ”

 

그때서야 노엘 로즈는 들어오면서 현관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떠올랐고, 이미 정체를 모를 사내의 발걸음은 점점 서재를 향해 다가 오고 있었다.

 

“ 뱅상 형님? ”

‘ 자끄 삼촌이다! ’

 

당황한 노엘 로즈는 서재문 쪽을 보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오직 눈만이 불안감에 깜박일 뿐이었다.

 

“ 뱅상 형님! 문도 안 잠그고 어딜 가신 거지? ”

 

그런 알랭을 재빠르게 낚아 채 은신처로 들어간 것은 제롬이었다. 간 발의 차이로 은신처의 책장 문이 닫혔고, 쟈크는 서재로 들어섰다.

 

“ 뭐야. 역시 아직도 퇴원을 안 한 겐가? ”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는 서재 안에서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 누구세요? ”

 

곧이어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안느! 잘 지냈소? 오랜만이구만. ”

“ 아, 쟈끄군요. 난 또 누군가 했네. 그런데 주인도 없는 집에서 뭘 하시는 거죠? ”

“ 뭘 하긴, 지나가다가 형님 안부가 궁금해서 들렸지. 퇴원 하셨나 해서.”

"3년 만에 갑자기 안부가 궁금해요? 별 일이네요. “

“ 안느가 몰라서 그러는데, 난 언제나 형님 걱정을 한다오. 친척 중에 형님 안부를 나만큼 챙기는 사람도 없을 걸.

“ 어련하시겠어요. 교수님은 아직도 병원에 계세요. 난 잠깐 물건을 가지러 왔구요.”

“ 아이구, 아직도 퇴원을 안하셨구만.”

" 다 알면서 능청 부리지 말아요. “

“ 안느,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거 없잖소. 그리고 무슈 베아르 말고 쟈크라고 부르라니까. 나는 언제나 형님을 사랑한다오. 아마 형님도 그럴 걸. ”

“ 퍽도 그러시겠지요. 뭘 그리 두리번대요.”

 

순간 노엘 로즈는 자신들이 마시던 찻잔이 떠올랐다. 눈썰미가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따뜻한 찻잔에 차가 반이나 남아 있다는 것과 먹다 남은 타르트를 보고 금방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것이었다.

 

노엘 로즈는 긴장하여 자기도 모르게 제롬의 손을 꽉 잡았다. 제롬의 크고 따뜻한 손이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노엘 로즈의 어깨를 안았다. 노엘 로즈는 얼떨결에 제롬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안다시피 한 채 어두운 은신처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포옹한 채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 그나 저나 이 집은 지은 지 얼마나 됐소? ”

“ 집이요? ”

“ 혹시 크게 수리해야 할 곳은 없지? ”

“ 갑자기 왠 집 타령이예요. 설마 이 집이 탐나는 거예요? ”

“ 설마. ”

“ 나가요. 주인도 없는 집에. ”

 

잠시 후 쟈크와 안느가 서재를 나가는 듯,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바깥의 소리들은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지만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는 생각에 노엘 로즈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은신처는 좁고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노엘 로즈는 자신의 목덜미 근처에서 부드러운 제롬의 숨소리를 느꼈다. 그리고 이유 없이 들뜨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 내가 왜 이러지. ’

 

그러다 자신이 아직도 제롬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려 했다.

 

“ 노엘 로즈... ”

 

하지만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제롬의 목소리는 듣자, 노엘 로즈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이었지만 노엘 로즈는 제롬의 눈이, 코가, 입술이 어디 있는지 그린 듯이 알 수 있었다. 제롬의 뜨겁고 달콤한 숨결이 알랭의 귀에서, 목으로 그리고 뺨으로 흘러 입술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롬의 숨결은 이제 노엘 로즈의 입술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 노엘 로즈...”

제롬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거칠고 허스키하게 갈라졌다. 그의 목소리에 어지러움을 느끼던 노엘 로즈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이제.. 괜찮아. 나가자. 아무도 없어.”

“ .... ”

 

제롬은 그런 노엘 로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복잡 미묘해보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망설이던 제롬은, 하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뒤로 자신이 어떻게 그 집을 나왔는지 노엘 로즈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그 집을 뛰쳐 나왔을 때 자신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제롬이 어떤 얼굴로 그런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 제롬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로엘 로즈는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자신을 부르는 제롬의 뜨거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 노엘 로즈... 노엘 로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