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이인좌의 난(무신란), 정감록 속 李亡鄭興(이망정흥) 내용은?

10일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영조시대에 일어난 무신란(이인좌의 난)에 대해 조명한다.

1728년 무신년,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전국적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의 주모자인 이인좌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으로 불렸지만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란 의미로 ‘무신란’이라 불리는 1728년의 반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왕. 재위 초기에 닥친 위기, 무신란을 영조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사건의 명칭조차 낯설지만, 영조의 새로운 리더십이 발휘되었던 무신란에 대해 알아본다.

■ 반란의 조짐, 괘서 사건

영조 즉위 초, 전국적으로 괘서들이 나붙기 시작한다. 괘서의 내용은 영조가 사관에게 ‘흉악한 내용을 기록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 충격적인 괘서의 핵심 내용은 영조가 선왕 경종을 독살했고,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

▲ 사진 : KBS
괘서가 발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을 지지했던 세력이 경종의 복수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청주에서 거병한 이인좌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반란의 움직임이 포착되는데… 재위 4년 만에 닥친 영조의 위기. 영조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했을까?

■ 민중의 베스트셀러 ‘정감록’

조선 후기 양반들 사이에서는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유행했던 정감록(鄭鑑錄). 정부에서 불온서적으로 지정했지만, 정감록은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는데… 일종의 예언서인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李亡鄭興(이망정흥).

▲ 사진 : KBS
즉, 이 씨가 망하고 정 씨가 흥한다는 것. 힘겨운 삶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갈망했던 민중들은 정감록을 믿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신란에도 참여했다는데… 왜 하필 다른 성 씨도 아닌 ‘정 씨’였을까? 조선시대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정감록’에 대해 살펴본다.

■ 영조를 살린 명장, 오명항

1728년 3월 18일 급보가 올라온다. 반란군의 우두머리격인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신하들은 영조에게 몽진을 청한다. 하지만 영조는 도성 사수를 단호하게 명한다. 이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이 스스로 토벌군을 이끌 것을 자청하고, 영조는 그를 토벌군의 총대장으로 임명한다.

▲ 사진 : KBS
위기의 순간 영조의 편을 자청한 오명항은 사실 반란을 주도한 세력과 같은 소론에 속한 인물! 그는 왜 스스로 같은 계파인 소론이 일으킨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나선 것일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 오명항에 대해 ‘역사저널 그날’에서 재조명해본다.

■ 나는 노론의 임금이 아니다!

“감히 반역의 죄를 일으키니 그 근본 원인을 구한다면 어찌 당론이 아니겠는가?”

무신란을 진압한 후 영조는 반란을 겪은 심정을 고백한다. 그는 무신란을 일으킨 자신의 반대 세력을 비난하기보다, 반란의 책임이 당쟁이 있다고 지적한다. 노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왕위에 올라, 노론의 임금으로 여겨지던 영조. 그러나 자신은 노론의 임금이 아니고 조선의 임금이라고 천명하면서 당파를 초월한 탕평을 추진한다. 당쟁의 폐해를 혁파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탕평을 제시한 영조의 새로운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영조의 집권 초 최대 위기, 무신란. 그러나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탕평의 길로 나아가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영조.

10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영조시대를 이해하는 관문인 무신란에 대해 살펴본다.